오랜만에 이글루에 들렀더니, 얼음 덩어리들은 모두 녹아 내린듯... ㅋㅋ
회사일은 주 4일 정도는 야근인데, 그나마 짬짬이 데이트를 하려니 글을 쓴다는 것은 커니와, 글 읽을 시간... 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오늘은? 그냥 일하기 싫어서 딴청을 피다보니 문득 잊혀진 얼음집이 생각나서 ^^;
그 사이에 많은 영화들- 포뇨/워낭소리/과속스캔들/작전/벤자민...-을 봤는데 이 중에선 <벤자민..>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던 영화였다.
지난 주 금요일에 사실 슬럼덕..을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잘 안맞아서 책읽어주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일단 평을 먼저 적으면, 훌륭했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연기가 모두 좋았고, 연출도 좋고, 시나리오도 좋고...
꼭 보라고 권하고 싶은 영화다.
영화를 보는 동안 역사속에 휩쓸린 개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나를 압도하더라. 영화의 자세한 내용은 직접 보기를 권하며... 아래 글은 영화를 본 사람만 알아먹을 듯. 별로 스포일러는 없음둥.
비교하고픈 영화가 있는데, <반딧불의 무덤>. 일본 에니메이션으로 서구에서는 많은 호평을 받았고, 한국에서는 많은 불쾌감의 대상이 되었던 영화다. 내가 저 에니메이션 감독을 좋아해서 그런 지(그의 다른 영화나 글을 통해 볼 때, 군국주의 시절을 미화할려는 사상과는 100만 광년 떨어진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전쟁에 희생된 개인을 바라본 영화로 보았고, 무척 좋게 본 영화다.
그렇더라도, 당시 일제의 피해를 입은 역사를 가진 한국인들은 해외의 많은 사람들이 호평한 <반딧불..>을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 밖에는 없는 것 또한 당연할 것이다.
이제 입장은 바뀌어서 <더 리더>를 보는 내 시각에 나찌의 학살을 당한 유태인들이나 집시, 혹은 많은 폴란드인들의 후손들의 역사의식이 반영되어 있을까? 별로...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이성적으로 되집으면서 생각할 수는 있었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역사로 비롯된 분노의 감정은 생기질 않았다. 아마도, 희생자들의 후손들은 이 영화를 나처럼 역사에 희생된 개인의 이야기로 편하게 볼 수 없었을 것 같다. 과연, 내가 유태인의 후손이었다면, 영화 마지막 부분에 주석깡통을 받아주는 생존자 딸의 어려운 용서(?)를 지지할 수 있었을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남녀 두 주인공의 삶이 불쌍해서 울었지만,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는 '과연 그 희생된 인생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를 되집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한나라는 캐릭터가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하루, 이틀, 곰곰히 생각해 보니, 한나는 사회가 바라는 모습을 자신의 욕구보다 더 우선시하는 인간이었던 것이 문제였던 듯하다. 그녀는 사회가 보내는 문맹에 대한 비웃음을 죽음(자신에 불리한 증언으로 받을 수 있는 종신형)보다 두려워하였고, 나찌가 내린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마이크와의 사랑이야기는 한나라는 여인이 감정을 가진 인간임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사회와 연결된 관계에서 그녀가 취하는 행동은 철저히 사회가 바라는 모습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한나는 단순히 문맹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개인감정)으로 직장을 옮기고, 거짓자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문맹인은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혹은 버려질 것)이라는 공포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사회(혹은 연인)으로부터 버려지기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버려지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언젠가 다시 구원받을 기회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글을 배움으로 부끄러움을 벗어던지게 된 것이 아니라, 글을 배움으로써 마이크와의 관계가 다시 연결되었다고 행복해 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한나의 오해였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마이크의 의지로 버림받았음을 알게 된 후 자살을 선택하지만...(물론, 그 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요.)
또, 그녀는 불에 타죽는 300여명의 인간을 살리기보다는 당시 자신이 포함된 사회(나찌)가 원하는 모습을 수행한다. 그리고, 20여년이 흘러 사회가 다른 모습을 수행했기를 원한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그러나, 그 분노는 오래가지 못하고 재판관의 질타에 이내 풀이 죽는다. 왜냐하면, 그 것이 현재 사회가 원하는 모습이니깐.
(사실 한나의 대화를 통해 재판관은 그의 정신연령을 검사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전체주의의 의지를 구현하는 한나라는 인물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 있는 너무도 많은 '한나'를 떠올리지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이 사회의 희생양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희생자로써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만, 가해자로써 그들에 분노할 수밖에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ps: 공교롭게도 한국의 '한나'들은 주로 '한나**'을 지지하는 듯... -_-a